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수아 1세 (문단 편집) === 내치에서의 업적 === 대외정치와 재정쪽으로는 실패를 거듭했지만 인격적으로는 '''[[예술]]의 후원자이자 인간적이고 너그러웠던 유쾌한 왕'''이라는 평가를 듣는다. 프랑수아는 호탕하면서도 너그러운 성격으로, 당대 [[프랑스인]]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. 또 프랑스 궁정에서 평민 출신으로 푸대접을 받던 며느리 [[카트린 드 메디시스]]를 항상 염려하고 챙겨주었다. 문화적인 공적도 많은데 '''이탈리아 반도의 [[르네상스]] 문물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여 문화 발전의 초석을 닦았다'''. 특히 [[레오나르도 다 빈치]]를 후원해주고 여생을 보낼 수 있는 저택을 제공해준 것으로 유명하다.[* 이렇게 프랑수아 1세가 다 빈치를 후원해주었기 때문에 다 빈치는 감사의 의미로 <[[모나리자]]>를 비롯해서 프랑스로 올 때 가지고 온 작품들을 모두 왕에게 선물했다.] 그가 예술 문화 발전의 기틀을 다진 덕분에 그 아들인 [[앙리 2세]] 대에는 이탈리아 출신 왕비 [[카트린 드 메디시스]]의 공로로 프랑스의 문화가 급격히 발전하게 되었다. 궁정 역시 정비되어, '''기존의 거친 궁정을 대신하는 세련된 궁정이 도입되었다'''. 그리고 [[라틴어]]를 밀어내고 '''[[프랑스어]]가 [[공용어]]의 위치를 확립했던 것도 이 시기(1530년대)였다'''.[* 다만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처음 선언한 곳은 프랑스가 아니라 당시 [[사보이아 공국]]의 자치주였던 [[발레다오스타]]였다. 발레다오스타는 지금도 [[이탈리아]]의 [[프랑코포니|프랑스어권]] 지역으로 남아있다.] 1519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에 출마했는데, 여기서도 카를로부터 태클이 들어왔다. 선거 자금으로 300,000 굴덴을 뿌렸으나 경쟁 후보인 [[카를 5세]]가 당시 독일 최고의 금융 가문으로 통하던 푸거 가문과 벨저 가문의 힘을 빌려 850,000 굴덴을 뿌린 결과, 선거에서 패배한 것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